전쟁이 터지면 특허는 어떻게 될까? — 속지주의로 인한 특허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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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성엽 변리사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순간 전 세계 경제에 충격파가 일었습니다. 불과 2주 후인 3월 6일, 러시아는 ‘비우호국’ 특허를 0% 보상으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 299를 발표했습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 등 서방 기업들의 특허가 하루아침에 ‘공짜’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특허는 과연 ‘절대적’ 권리일까요? 아닙니다. 속지주의라는 치명적 한계 때문에 전쟁, 제재, 외교 갈등 앞에서는 언제든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국경’ 안에서만 유효한 특허권

특허권은 속지주의(Territorial Principle) 원칙을 따릅니다. 한국에서 특허를 받았다고 해서 중국이나 미국에서 자동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각국에서 별도로 출원하고 그 나라 법률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평시에는 파리협약(177개국), PCT(153개국) 같은 국제조약이 국가 간 특허보호 기능을 수행합니다. 파리협약(1883년)의 핵심은 우선권 제도입니다. 한국에서 특허를 출원한 날로부터 12개월 이내에 다른 회원국에 출원하면, 나중에 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출원일을 기준으로 신규성과 진보성을 판단받을 수 있어, 다른 나라에 동시에 특허출원 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주어진 12개월 동안 번역문도 작성하고, 그 나라 변리사나 변호사도 선임이 가능합니다. PCT(특허협력조약, 1970년)에 따른 국제특허출원을 한다면, 파리 협약의 12개월보다 긴 30개월(또는 국가에 따라 31개월)의 여유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상표의 경우 마드리드 의정서(1989년 발표, 1995 한국 가입), 디자인권의 경우 헤이그 협정(1925년 설립)에 의해 국제적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https://www.kipo.go.kr/ko/kpoContentView.do?menuCd=SCD0200164

하지만 전쟁이나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이 모든 국제협약은 ‘안보’라는 명분 앞에 무력해집니다.

러시아 사례: 21세기형 ‘특허 전리품’

대통령령 299의 핵심 내용:

  • 비우호국(미국, EU, 일본, 한국 등 48개국) 소유 특허 강제실시
  • 보상율 0%로 고정 (평시엔 특허권자와 협상 필요)
  • 러시아 기업이 신청하면 자동 승인

실제 피해 규모: 2024년 말까지 러시아 특허청이 승인한 강제실시는 130여 건. 이 중 90%가 IT, 의료, 농업 바이오 분야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화이자 의약품, 존디어 농기계 특허 등이 ‘합법적으로’ 무단 사용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패턴: 전쟁과 IP 몰수

1차 대전: 아스피린이 전리품이 된 날

1918년 아스피린 경매 사건

미국은 대적성 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1917년)에 근거하여 독일·오스트리아 등 적국 기업의 특허·상표 약 4,000건을 몰수했습니다. 이 법은 적국과의 거래를 금지하고 관련 자산을 압류할 수 있도록 허가한 법률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독일 바이엘(Bayer)사의 ‘아스피린(Aspirin)’과 ‘헤로인(Heroin)’ 상표였습니다.

1918년 12월, 이 상표들은 뉴욕 경매장에서 “전리품”으로 팔려나갔습니다. 미국의 스털링 프로덕츠(Sterling Products) 사가 아스피린 상표를 518만 달러에 낙찰받으면서,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아스피린은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케미컬 파운데이션의 4,500건 특허 헐값 매각

1919년, 미국 정부는 독일 화학 특허 4,500건(당시 가치 800만 달러)을 케미컬 파운데이션(Chemical Foundation)이라는 민간 재단에 25만 달러에 일괄 매각했습니다. 이곳은 미국 화학 산업의 발전을 위해 정부 주도로 설립된 기관으로, 사실상 헐값에 넘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는 실제 가치의 3%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기업 파르프베르케(Farbwerke)는 반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931년 미국 대법원은 “전시 몰수는 합헌”이라며 기각했습니다.

2차 대전: 3만 건 특허의 ’15달러 라이선스’

대통령 행정명령 9095호(Executive Order 9095, 1942년)

부활한 적국 자산 관리국(Alien Property Custodian)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 기업의 특허 3만 건 이상을 ‘국가자산’으로 묶었습니다. 이 기관은 미국 정부 내에서 적국 소유의 자산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덕분에 미국 기업들은 연 15달러만 내면 이 특허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압류 대상의 범위:

  • 독일 화학기업 I.G. 파르벤(I.G. Farben)의 합성고무·나일론·도료 특허
  • 독일 광학기업 자이스(Zeiss)의 광학계 기술
  • 일본 통신기업 NEC(엔이씨)와 후지쯔(Fujitsu)의 통신 특허
  •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 미국 저작권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 갈등으로 인한 미쓰비시 특허 압류 사태

2018년 강제징용 배상 판결 후폭풍

2019년 3월, 대전지방법원은 미쓰비시중공업(MHI)의 특허권 6건·상표권 2건을 압류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 미지급이 원인이었습니다.

압류 대상 지식재산권:

  • 고온용 배관 구조체 특허
  • 리튬이차전지 전극 특허
  • 상표권

2021년 대법원이 최종 확정했지만, 일본 정부의 ‘보복 관세’ 경고와 외교적 마찰로 실제 현금화는 2025년 현재 보류 중입니다.

북한 저작권의 특수한 지위

한국은 북한과 특수한 상황에 있습니다. 헌법상 한반도 전체가 영토이므로 북한 저작물도 원칙적으로 “국내 저작물”로 보호받습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남북교류협력법 때문에 이용하려면 통일부 승인이 필요합니다. KBS·MBC가 북한 다큐나 음악을 방송할 때 지급한 저작권료는 남북협력기금에 보관되고 있으며, 향후 통일 시 정산될 예정입니다.

기업들의 대응 전략

위험을 직시하기

많은 기업들이 자신의 특허 포트폴리오가 어디에서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간단히라도 현재 상황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특허가 어느 국가에 집중되어 있는지, 그 국가들의 정치적 안정성은 어떤지, 주요 경쟁사들은 어떻게 특허를 분산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모든 기술을 특허로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전략은 특허와 영업비밀을 전략적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코카콜라가 130년 넘게 레시피를 비밀로 지키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특허로 공개했다면 20년 후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테니까요.

제품 외관으로 기술이 쉽게 노출되거나 역공학이 가능한 기술은 특허로 보호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제조 공정이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처럼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기술은 영업비밀로 보호하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이나 제조업체의 독특한 배합비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https://ip.techstone.co.kr/식품특허-vs-비법노하우

플랜 B 준비

동일한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는 대체 기술을 미리 개발해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R&D 예산의 10-15% 정도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보험과 같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사 특허를 회피하는 기술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 한 줄이 회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때 평상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조항들이 위기 상황에서는 생명줄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의 강제실시가 발생했을 때의 보상 기준을 미리 명시해두고, 정치적 위기 시 계약을 조기 종료할 수 있는 옵션을 포함시켜두면 손해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기술 자료가 있다면 이를 제3국에 보관하는 에스크로 조항을 둘 수도 있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중립국 중재기관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조항도 필요합니다. 이런 세심한 준비가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 큰 차이를 만듭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기업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방산 기업들은 오히려 기회를 잡았습니다. 한-일 분쟁시에도 사전에 공급망을 다변화해둔 기업은 생산 차질 없이 오히려 시장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었고, 소재, 부품, 장비 개발 기업들은 이익을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 회사의 지식재산권(IP) 포트폴리오를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국경선에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그 위험을 어떻게 분산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는 것—그것이 평화로운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비입니다.